작성일 : 05-01-05 00:00
* 편지
|
|
글쓴이 :
김영우
 조회 : 3,449
|
선생님.
누군가에게서 "이해받는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 만큼이나 얼얼한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병원문을 나설때, "이해받을 수 있다"는 감동에 마음이 얼얼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조용한 여운이 남습니다.
이토록 좋은 느낌을 이렇게 거친 단어로밖엔 표현할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나 자신과 부드러운 합일을 이루게 된다면 그때도 이렇게 좋은 느낌일까요.
뉴스에서는 여전히 동남아의 상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울 기운도 없는 사람들의 까칠한 얼굴들이 쓰라리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고통받지 않고 순식간에 끝났을 것이라는 추측은 위안
이 됩니다.
저에겐 위안이지만, 모든 것을 잃은 그 사람들에겐 지금 어떤 것도 위로가 되
지 않을 거예요.
잠깐이었지만 저도 군인이 되려 한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몰래 원서를 내
고 지원을 했었습니다. 서류전형에서는 통과되었지만 신체검사인가 체력검사에
서 떨어졌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왜 내가 군인이 되려 한 것일까 의아해집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도 아니었고 제복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어요.그저 피폐하
고 씁쓸한 마음으로 "나는 군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체력이 미달이었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손에 진짜 무기가 들려지면 정말 위험했을 거예요.
어릴적 숲속에서 많은 시간을 혼자 놀며 즐거운 공상을 많이 했었습니다.
바깥세상에 대해서도,도시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저는 세상을 동
화속에 나오는 모든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공간일거라고
상상했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상상을 넘어서 거의 확신하고 있었
기 때문에 전 혼자 숲에서 놀면서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하고,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살펴줄 것이고,선한 것
은 언제나 승리하고, 악한 것은 언제나 물리쳐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믿
고 있었습니다.언제부터,누가 제 마음속에 그런 "좋은 것"의 상을 심어놓았는
지는 몰라도 그 근거없는 막연한 믿음으로 인해 저는 다 큰 다음에도 계속된
혼란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훨씬 복잡한 곳이었고,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변질되기 쉬운 것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언젠가 들렀던 병원에서도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을 겁니다. 그 선생
님은 제게 유아기적의 환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어요.아마 그럴 수
도 있겠지요.
제 마음속에는 "삶의 법칙(기준)"이라할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명확한
지표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를 인도해 주겠다는 사람들의 말에 무턱대고 따르곤 했었습니다.
저 혼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했을 땐 제 영혼의 본능에 따랐습니다. 그때그
때 아마도 이렇게 해야하지 않을까하고 추측되는 쪽으로 행동을 선택했습니
다. 그 선택에 때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가 실려버리기도 했었고,사람들은
제 행동에 어처구니없어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다시 돌아가도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을 것 같습
니다.
그것이 "저"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제가 살아온 시간에는 제 영혼의 색깔이 모두 배여있는 것 같습니
다. 어둡고,아프고, 슬픔이 많은,여리고,나약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몹
시 아파하는 가여운 것을 보면 참기 어려운 혼란을 느꼈습니다."왜?"라는 질
문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슬픔과 연민이 주된 정서였고 그와 샴쌍둥이처럼 등을 맞대고 있는 감정은 분
노였다고 생각합니다.
제 마음을 반석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천천히 느린 속도로 제임스 알렌의 "마음의 연금술"을 읽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말들로 꽉 차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전 그 책에서 반복해서 나
오는 말,"법칙을 따르십시오.믿으십시오."라는 그 말의 뜻을 알 수 없어 답답
합니다.
만약,그 법칙이 무엇인지 알았다면,그리고 그 법칙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순응
할 수 있었다면 제가 그렇게 자주 맥없이 넘어지지는 않았을것이라고 생각합
니다.
아마도 그 법칙은 편협하지도 억지스럽지도 않을 것입니다. 따르기를 강요하지
도 않을 것이고 절대적인 복종이나 숭배를 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
든 것을 포용하겠지요.
그 법칙의 내용은 모르겠지만 그 참된 것,절대적으로 지혜롭고 선한 것의 존재
함에 대해서는 신뢰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문득 걱정이 됩니다. 제가 과거의 삶에서 지독한 악당으로 살았던 것은 아닐까
하고말입니다. 누군가에게 그만큼 아픈 고통을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아도 과부하가 걸려있는 머리에서 김이 나려고 합니다.
빛치료를 했습니다.
마비된 두터운 피부의 막에 싸여있는 듯 냉랭하고 황량한 느낌은 여전합니다.
하다하다 힘이들어 나중에는 애걸복걸 구걸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게도 빛을 주세요. 제발 빛 좀 내려주시면 안되나요?"하고요.
그러자 마음속에 툭 떨어진 한마디는 "당신이 빛입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무슨? 전 숨쉬기도 힘드는데요.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으나,아뭏든 그 한마디는 음습한 동굴에 울린 영롱한
물방울소리처럼 오래도록 제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병원은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긴밀히 연계하고 협조하
는 거대한 재활센터같습니다. 어쩌면 사실은 저 바깥의 세상도 그러한지도 모
른다고 은밀히 상상해보았습니다.
평안하세요,선생님. 고맙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