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1-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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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아 2001. 11월 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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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영우
 조회 : 3,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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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바쁘게 맴돌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새 달력은 한 장 밖에 남지 않
았고 별로 한 일도 없이 한 해의 끝자락이 또 다가온다. 나이 먹을수록 세월에
가속도가 붙는다던 어른들 말씀이 실감나는 걸 보면 나도 나이를 꽤 먹었나보
다. 각박하고 불안한 세파 속에서 상사 눈치 안보며 지내고 있으니 내 팔자도
괜찮은 편이라고 자족해보지만 힘겨운 삶의 얘기들을 하루 종일 듣는 것이 직
업이다 보니 갖가지 인생의 맵고 쓴 맛 속에 내 삶도 푹 젖어 들어있는 느낌이
다.
정신과 의사가 된지도 꽤나 긴 세월인데 기억 속에서는 의과대학에 입학한 때
가 엊그제인 듯 하니 레지던트 시절 아침회진 돌 때 어느 환자가 "선생님, 시간
은 안 가는데 세월은 너무 잘 가요." 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모두가 바쁘고 시간에 쫓기는 요즘은 정신과 병원에 입원해서라도 좀 쉬고 싶다
는 말을 하는 사람을 더러 볼 수 있다. 나날이 사회는 복잡해지고 경쟁은 치열
해가니 정신적 긴장과 몸의 피로를 제대로 풀면서 사는 사람이 드물어 시간이
갈수록 쌓이는 스트레스에 짓눌려 온갖 질병이 나타나게 된다.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 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 내과를 찾
는 환자의 70 % 이상이 사실은 정신과에서 치료받을 사람들이라는 보고도 있
다.
어떤 질병의 치료이건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와 치료자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의사소통이지만 정신과 진료에서는 그 점이 특히 더 강조된다. 환자의 가슴
깊이 쌓인 얘기를 성의껏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줄 수 있고 때로는 기
적과 같은 치료효과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어느 날 60 대 중반의 할머니가 딸의 부축을 받아가며 어렵게 진료실에 들어섰
다. "어머니께서 몇 년째 우울하고 기운이 없어 거의 움직이지 않고 하루 종일
누워서만 지내며 온 몸이 반 마비상태라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갖가지 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는 모두 이상이 없었고 별의 별 약을 다 쓰고 정신과 약도 많이
먹었지만 전혀 차도가 없어 최면치료가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
다."는 것이 딸의 얘기였다. 환자는 세상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통스런
한 숨만 내쉬고 있었고 노란 안색으로 기운이 없다며 몸을 가누기도 힘든 모습
이었다.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무척 힘들게 살고 있다
는 딸의 얘기를 들으며 환자의 마음 속에 쌓이고 맺힌 것이 많다는 사실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증상이 워낙 심해 처음 방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최면치료를 했지만 그 시
간에 한 치료작업은 환자의 긴장을 조금 풀어준 가벼운 이완상태에서 마음 속
에 있는 얘기를 무엇이건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전부였다.
한 시간 가까이 남편과 시집 식구들 때문에 고생한 얘기를 눈물 콧물 섞어 더듬
더듬 늘어놓고 난 환자는 답답하던 가슴이 훨씬 시원해졌다며 개운한 표정으로
눈을 떴고 부축을 받지 않고도 진료실 문을 나설 수 있었다. 다음 시간에 환
자는 몰라보게 호전된 모습이었고 딸 역시 첫 치료 후 환자가 훨씬 편안해졌다
는 점을 인정했다. 그 후 처음과 비슷한 치료작업을 두 세 번 더 하면서 평소
생활에서 긴장을 푸는 법과 몸의 통증을 줄이는 이완방법, 부담스런 감정을 마
음 속에 담아만 두지 말고 밖으로 표현하는 습관의 중요성 등을 가르친 후 모
든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와 치료를 완전히 종결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남편이 부당한 요구를 하면 같이 싸우면서 대항하고, 혼자 마음 속에
고민을 쌓지 않아요. 바보같이 뭐든지 혼자 참아야 되는지 알았던 게 잘못이에
요. 요즘은 집안 일도 혼자 다 하고 시간나면 이웃에 놀러도 잘 다녀요." 라고
말하는 환자의 모습은 처음 진료실에 들
어 섰던 병약한 노인이 아니라 밝은 혈색의 중년 아주머니였다.
이 같은 사례는 아주 흔하다. 사람의 마음 속에 세월과 함께 쌓이는 감정의 찌
꺼기와 스트레스가 얼마나 파괴적 힘을 가지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지
만 환자의 마음 문만 열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쉽게 그로 인한 괴로운 증상들
을 풀어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그러나 긴 시간의 힘드는 상담보다 손쉽고 빠른 약물치료에 더 의존하는 것이
요즘의 정신과 치료경향이니 이런 환자들이 적절한 도움을 받기가 점점 힘들어
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환자가 호전되지 않는데도 기약 없이 장황한 상담치
료만 고집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뇌와 신경조직에서 일어나
는 생화학반응의 산물이라고만 믿는 무지한 치료자들이 더 큰 문제라고 나는 생
각한다.
종래의 과학이 확인하거나 실험할 수 없었던 미지의 영역들을 하나 하나 새롭
게 건드려 감에 따라 현대의 과학은 우주와 인간의 본질이 가지는 심오한 측면
들을 조금씩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최신 물리학이 발견해 가는 새로운 사실들
을 바탕으로 심리학과 정신의학도 바뀌어가야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그런 움
직임이 주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응급의학의 발달로,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소생한 임사(臨死) 체험자들이 늘어
가고, 최면기법을 통한 인간 심층의식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정
신과 치료 영역에 있어서도 인간의 영혼과 죽음의 의미, 환생과 사후의 삶, 종
교적 신앙과 철학적 신념 등의 주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관심이 절실히 요구
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고통에 지친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를 통해 "증상의 호전" 을 바랄 뿐 아니라
힘들고 공허하게 느껴지는 자신들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인생은 과연 끝까
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삶에서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가치관과 방
향은 어떻게 찾을 것인지에 대한 의미 있는 대화를 목마르게 원한다. 그러나 비
용절감만을 강조하는 각박한 의료현실 속에서 약에만 의존하는 손쉬운 진료에
길들어 가는 정신과 의사는 복잡한 문제를 가진 환자와 나누는 긴 시간의 상담
에 소홀해지고 서툴어질 수밖에 없다.
정신과 의사는 "사랑을 파는 직업" 이라는 말이 있다. 환자는 의사에게서 기계
적인 상담기술만이 아니라 따뜻함을 더 원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터놓을 곳 없
는 사람들에게 정신과 의사는 정답고 지혜로운 부모가 되고 형제가 되고 성직자
가 되어줘야 한다. 질병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한 사람의 인간이며
불멸의 영혼으로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태도를 바탕으로 환자가 삶의 긴 여정을
올바로 끌어나갈 수 있도록 철학과 신념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고, 죽음의 두려
움을 초월할 수 있는 영적 깨달음으로까지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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