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5-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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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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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영우
 조회 : 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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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갑자기 차가와진 날씨에 건강하신지요.
며칠째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렇다할 줄거리가 있는 것은 아닌데 괴로운 마음을 느끼며 밤새 뒤척
입니다.
어젯밤엔 폭격기 몇대가 제 주변의 집들을 겨냥하여 폭탄과 총을 난사하는 꿈
을 꾸었습니다.
나무와 얇은 벽돌로 만들어진 엉성한 집들이 도미노처럼 지붕부터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꿈속에서도 "이건 꿈일거야.이건 꿈이야.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어젯밤 퇴근하여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끝에 아버지는 제게 고래고래 소리
를 지르셨습니다.
" 왜 매사에 부정적이냐. 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갖지 못하느냐. 대
체 원하는게 뭐냐. "
제 딴엔 노력하고 있지만 저의 말과 사고와 행동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담겨있
습니다. 네가 원하는게 뭐냐는 아버지 말씀은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횡설수설하면서 길게 이야기할때 가족들은 대개 제가 무얼 말하고 싶은것
인지 알지 못합니다. 제게 주어진 일들을 결국 피하지 않고 다 처리할것이면서
도 계속해서 어떤 불편함에 대하여 말하는 저의 태도가 가족들에게는 불평불
만이나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비치나 봅니다.
아주 직설적으로 말해도 논리정연하기 어려운 제가 말을 빙빙 돌리고 있으니
그런 반응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이 무섭다."는 것이고, 제
가 원하는 것은 제 안의 공포감을 이해해주는 마음입니다.
어젯밤 10시에 집을 나서서 대공원에 갔었습니다.
늦은 시간인데다가 날이 너무 차서 대공원 전체에 저밖에 없는것 같았습니다.
드넓은 대공원을 가득 채운 달빛속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걸었습니다.
차갑고 청명한 공기속에서 달빛에 환해진 길을 오래도록 걸었는데 아버지와의
대화로 괴로웠던 마음이 점차 가라앉고 주위의 사물들이 저와 하나인것처럼
일체감을 주며 다가왔습니다.
백미터쯤 일렬로 늘어선 나무숲을 걸어갈때 양옆에서 천천히 잎을 흔들어주는
나무들의 모습이 제게 무겁고 느린 갈채를 보내주는 속깊은 친구들같았습니
다.
나무와 풀과 꽃들,물오리와 새들, 호수위에 쏟아지는 달빛과 총총한 별들....
저마다 자기자리를 지키고 서서, 가진 모습 그대로 아름답고 더할나위없이 훌
륭했습니다.
타인의 이해와 호응과 관심에 기대지 않고도 침착하고 품위있는 모습으로 완벽
하게 주어진 본분을 다해내는 생명들이 그 자리에 가득 있었습니다.
잘함과 못함이 없고,높음과 낮음이 없고,성공과 실패가 없는,저마다의 길을 날
마다 최선을 다해 다박다박 걸어가는 삶, 대질서에 대한 깊은 신뢰속에서 평화
로운 삶,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제게 말하고 있었어요.
저의 치료초기에, 지금보다 더 어리벙벙했던 제게 선생님은 말씀해주셨어
요.
"어둠속에서 아파하는 생명이 있을때 신은 그보다 더욱 아프다"고요. 그 날,신
의 겸허함에 대해서도 함께 듣고 이후로 자주 마음에 새기곤 했었습니다.
공원을 혼자 걸으면서,온 우주에 빛으로 함께 계실 아버지와, 그분이 품고계
실 아픔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가야할 길을 존중하시는 그분의 겸허함에
대하여 생각하였습니다.
신과 함께 선 "나"를 생각할때 "나"는 작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커집니다.
빛속의 빛,대생명속의 생명,위대한 사랑안의 사랑....어딜가도 제가 이보다
더 커질 순 없겠지요.
아빠 말씀에 상처받고 암담했던 마음을 산책을 통해 잘 추스리고 돌아올 수 있
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결혼을 하지 못하거나,영영 사람들과 웃으며 어울리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찌해야 하는지 생각만해도 숨이 막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한켠엔 할수있는데까지 최선을 다해 끝까지 걸어야
하는 길에 대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선생님과의 치료를 통해 얻은 또하나의 수확입니다.
느리고 또 느리지만,아무도 흔들지 못할만큼의 확고함으로 제 안에 빛이 뿌리
내리기를 바래요.
이따금, 선생님과의 치료 또한 머나먼 제 길의 일부라는 생각을 합니다.
문 바깥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립니다. 대번에 두려움이 마음을 파고 들어
옵니다.
빛을 생각하며 집으로 가야겠습니다.
평안하세요,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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