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6-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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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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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영우
 조회 : 5,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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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가을비가 내리던 끝에 제법 매운 추위가 찾아왔습니다.
잠시 선생님께 글을 쓰려고 앉았어요.
약 없이도 잠을 잘자고 큰 우울도 없습니다.
예전의 저라면 우울의 빌미가 될만한 자잘한 일들이 몇차례 있었지만 그런대로
잘 지나갔어요.
일년만에 감기에 걸려 일주일째 앓고 있는 것 말고는 몸의 건강도 괜찮습니다.
온몸의 관절들이 사소한 통증을 일으킬때 좀 우울해지기는 합니다.
며칠전 비가 내릴때는 온몸에 금이 간것처럼 아팠지만 정형외과에는 가지 않았
습니다.
정형외과에 가도 불편한 곳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것 같아서요.
지난주 토요일에 대학동기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낯선 길이어서 장소를 찾느라 헤맸어요.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하여 자리에 앉
자마자 일년만에 만난 동기들이 저를 향해 결혼 안할거냐고 속사포처럼 질문들
을 쏟아내었습니다.
여러 동기들이 제게 소개해줄 남자의 신상정보를 가지고 나왔더군요.
결혼을 하든 안하든 사람을 만나는것조차 피하는것을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습니
다.
저도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어서, "그냥 어려워서...그런 자리가 즐겁지 않아
서..."하며 우물거렸습니다.
동기들은 여러가지 말로 저를 설득하기도하고 아기를 키우는 비길데없는 기쁨
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곰곰히 한참을 듣다가, " 결혼을 하지 않고 결혼을 한 것만큼 의미있게 살수
는 없을까? "그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어쩌면 정답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 속에서 한 질문이었는데 동기들은 일제
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한참 오간후에 한 아이가 제게 이렇게 물었어요.
"남편도 없고,아기도 없으면 긴세월 남아도는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하려구 그
래? "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때부터 오늘까지 " 남아도는 에너지 "라는 그 단어
가 자주 떠오릅니다.
지금까지는 오랫동안 아팠기때문에 그것과 맞붙어 씨름하느라고 제 안의 모든것
이 소진되었습니다.
남아도는 에너지는커녕 우울과 공포속에서 그날그날을 넘기기도 힘들었어요.
아우슈비츠에 다녀온 이후 한달여를 지내면서 내게도 무언가가 있었으면하는 생
각을 마음속으로 자주 했었습니다.
남은 삶의 에너지를 참으로 가치있는 것에 집중시키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합니
다.
동기들과 만났을때는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배불러서 저러지."하는 류
의 반응은 피하고 싶었어요.
평생을 맡길 남편감을 찾거나 좀더 안정된 직장을 구해서 노후에 대비하라는 충
고가 이어질테니까요.
그런 부분이 저에게 결핍되어있다는 걸 잘 알고,그래서 이따금 불안하기도 하지
만, 그래도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가족들 사이에서 저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 생계를 위한 일들을 성실히 다하
면서 그와 동시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저에게도 기쁜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동생내외가 얼마전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았는데 결과가 나왔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약간의 문제가 생겨있다고 했습니다.
예전같으면 "양호"가 아니면 무조건 불안에 떨었을텐데 이번엔 조금 염려하며
그냥 지나갔습니다.
남동생과는 여전히 별다른 대화를 못하고 지내지만 얼마전처럼 숨막히는 벽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아침에 나올때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길래 쌍화차를 끓여주었더니 고맙다는 인
사까지 했어요.
외할머니 기일이라 월요일에 엄마가 시골에 내려가셨습니다. 출발할때 기차안에
서 읽을 책을 찾으시기에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안내서"라는 책을 드렸습니
다. 평생 호스피스 간호사로 일한 사람이 쓴 책입니다.
책을 받아든 엄마는 새파랗게 젊은 애가 이런 책을 보고 있느냐는 핀잔을 하셨
지만 가방에 넣어가셨습니다.
아직 젊은 축에 속한다는건 알지만 어쩐지 죽음이 그리 까맣게 먼 일로 느껴지
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언제나 마음 한켠에 염두해 두어야 할 일로 생각됩니다.
어떻게 살아야할까.죽음을 어떻게 맞아야할까. 한벌의 수저세트처럼 항상 제 안
에서 붙어다니는 생각입니다.
지난 치료를 마치고 돌아와서 유란시아서 4부를 시작하기전에 3부의 뒷부분(생
각조절자 부분)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번에 읽을때는 "의지와 선택"이란 단어에 눈길이 자주 머물렀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의지와 선택보다 결코 앞서 가시지 않는다는 말이 인상적이었
습니다.
잘못된 의지와 선택까지도 그의 것으로써 존중된다는 말 역시 그랬습니다.
당신의 권능과 혜안으로 어둠의 늪을 피해갈수있게 조정하지않으시고 오히려 잘
못된 선택으로 인한 괴로운 결과를 당신도 함께 겪으며 가신다는 말이 가슴에
사무쳤습니다.
아우슈비츠 생각이 났습니다.여러 전쟁들도 생각났습니다.
우리의 무지함과 이기심으로 생긴 전쟁,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신음으로 가득찬
아우슈비츠,그 모든것을 묵묵히 함께 참아내셨을 그분을 생각합니다.전쟁은 가
해자와 피해자 모두의 영혼을 뒤흔든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실제로 겪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배울 수 없는 존재들임
을 알고계셨나 봅니다.
3부 끝부분을 다시 읽으며 일본승려로 살았던 지난 삶도 여러번 되돌려 보았습
니다.
계율과 경전을 통한 수행이라는 것에 깊은 회의를 갖게 만든 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통렬하게 품었던 그 바램은 결국 저의 의지와 선택으로서 우주의 마음에
그대로 받아들여졌나 봅니다.
출가 전, 꽤나 현학적으로 보였던 그 귀족청년은 평탄하게 승려생활을 하게 되
었다면 출가의 본뜻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출가해서 열심히 수행하
여 반드시 생로병사의 의미를 깨닫고 중생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야심
만만한 계획도 계급(?)이 높아짐에 따라 희미해질 수 있었을테지요.
전 가끔 푸념을 했었습니다. 그런 선택을 해서 심란스러운 천 년을 보낸끝에 내
가 얻은게 무언가하는....
상처투성이가 된 마음말고는 남은것이 없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 다녀온후에 많이 홀가분해졌기때문인지 제 마음을 더 유심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는 사람에 대한 공포와 혐오뿐만 아니라 이 험한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
료들에 대한 살아있는 연민과 이해가 함께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양쪽 모두
부정할 수 없게 또렷이 자리해 있습니다.
인간 삶의 천 년은 우주의 시간으론 눈깜짝할 순간이라고 치료때 말씀해 주셨지
요. 지금 이 시간은 지난 천년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시작을 할 수 있는
첫마디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의지로서 새로운 선택을 하고싶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했어요.
이번에는 일본승려때처럼 감정적으로 정신없이 선택하지 말고 신중하게 생각해
서 결정할래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이 가을을 살고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과거 천년과 미래의 영구한 시간을 가로지르는 생각들이 오가지만
하루하루를 지탱해가야하는 일상은 언제나 생생한 무게로 짊어지워져 있습니다.
내게 오는 모든 것이 나의 삶이라는 생각을 아까 잠시 했었습니다.
일곱시인데 벌써 캄캄합니다.
차가운 날씨에 평안하세요,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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